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미군 (문단 편집) === 전쟁범죄 === >리드 :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구금한 후 심문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 > > 오즈번: 심문 과정에서 살아남은 구금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 > > 리드: 심의나 재판 절차 없이 전원이 죽었단 말인가요? > > > 오즈번: 베트콩에 협조했다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전원이 처형되었습니다.[* 참고로 한국도 빨치산 토벌 당시 빨치산과 조금이라도 협력한 자들과 항복한 자들까지 다 처벌했지만 결국 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는 항복을 유도하는 쪽으로 선회했고 특히 빨치산에서 전향한 자들을 토벌에 적극 활용했다. 이 전직(?) 빨치산들은 목숨만 살아도 감지덕지라 여겼는데 오히려 빨치산 토벌에 참여하게 되자 더 열렬하게 빨치산을 잡아들였다고... 게다가 대민지원도 군이 아닌 민간단체에 맡겨 버리니 베트남 주민들은 '쌀 줬으니까 됐지?' 해놓고 쌀을 던져놓고 가버리는 미군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67 >도망치는 놈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빅터 찰리]]다! 그대로 있는 놈은 잘 훈련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빅터 찰리]]다! >Anyone who runs is a V.C.! Anyone who stands still is a well-disciplined V.C.! >----- >- [[풀 메탈 재킷(영화)|풀 메탈 자켓]] >미군의 전술항공 지원은 베트남 전선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네이팜탄 투하와 세열폭탄에 사살되는 사람들이 베트콩 게릴라인지 아니면 단순한 농민인지를 구분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 > 1962년 7월 7일 뉴욕타임스 보도 > 나레이션: 이 전쟁은 적과 민간인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 > > 베트남 민간인 증언자: 미군은 가는 곳 마다, 방화와 파괴 그리고 살상을 자행했습니다. 저는 게릴라가 살상당한 것을 목격한 적이 없습니다. 전부다 민간인이었죠. >------- >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 [[https://youtu.be/mLXoeelZ7XA|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 > 만약에 베트남 전쟁 당시 전투에 관여했던 참전용사 중에 당신에게 '''전투 중에 정말 그런 참극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 > [[데일 다이]]의 증언[*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로 1968년 구정 대공세도 직접 겪었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플래툰에서 군사 고증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드라마에서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506연대장 로버트 싱크 대령 역으로 출현했다. 또한 FPS 게임인 메달 오브 아너 시리즈에서도 성우를 맡기도 했다. 링크로 인용한 유튜브 영상을 보면, 올리버 스톤이 제작한 영화 플래툰에서 나온 미군의 잔혹행위들이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엄청나게 많이 일어났고,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며, 전투부대로 배치된 모든 미군 부대에서 일어났다고, 데일 다이는 증언했다. 미국 전쟁영화에서도 군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고, 여러 다큐멘터리 제작 및 무기 관련 고문까지 맡고 있는 전문가(그리고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가 얘기했다는 점에서 공신력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https://youtu.be/EMuoWSpiNxk|#]] > 베트남 전쟁을 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캘리 중위와 몇몇 나쁜 병사들이 미라이 학살을 자행했으며, 미라이 학살 하나만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을 들어다 보면, 베트남 전역에서 미라이 학살이 일어났죠. >------- > [[브루스 커밍스]]와의 인터뷰에서[* [[https://youtu.be/6KCBH2QVLok|인터뷰 자료는 이 자료를 참고.]] 11분 18초부터 11분 30초까지를 보면된다.] >우리는 고향에 돌아와 침묵할 수도 있었습니다. 입을 다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를 위협하는 것에 대해, 알려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미국 남성들이 폭력을 배웠고, 역사상 가장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죽을 기회를 얻은 수백 만의 남자들이 분노와 배신감에 가득 찬 채 돌아왔지만, 아직 아무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마을을 구하기 위한 파괴 행위를 합리화했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도덕성을 잃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은 냉정하게 미라이 학살을 받아들였고, 초콜릿과 껌을 나눠주는 미군의 이미지를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무차별 사격 지대의 의미를 배웠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쏘았으며, 동양인의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는 미국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사망자 수를 위조, 아니 오히려 그것을 미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장군이 언덕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한두 개의 소대를 잃은 후, 북베트남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언덕을 떠나 행진했습니다. 미국인은 이것을 생각하길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베트남에서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이 되라고 어떻게 요구하겠습니까? 실수로 죽는 마지막 사람이 되라고 어떻게 요구할 수 있을까요? 30년이 흐른 뒤, 다리, 팔, 얼굴이 없는 우리 형제들이 길을 걸을 때, 어린이들이 부상당한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는 '베트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하고 가당찮은 기억이 아닌, 미국이 마침내 변한 곳 그리고 우리 같은 군인들이 변화하도록 도운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 [[존 케리]]의 연설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 내용이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군과 CIA가 공동으로 전개한 '''"피닉스 전략(Phoenix Program)"'''을 통해서 1968년부터 1971년 까지 약 27,000명을 체포하여 20,000명을 어떠한 물증이나 근거도 없이 학살했다고 한다. 벤자민 발렌타인의 책에 따르면, 많게는 27,000명에서 41,0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한다. 이 작전에는 그린베레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의 특수부대들이 참여했고, 성고문, 전기고문, 거꾸로 매단 상태에서 행하는 물고문 그리고 무차별 구타와 같은 잔혹한 고문들을 자행했다고 한다.[* 출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p.415] 그리고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은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야수적인 범죄"였다고 털어놓았고, 6인치 나사못으로 뇌를 관통 당해 사망한 시신을 자신이 직접 확인했다고도 증언했다. 확실한 물증없이 사살된 사람들 대다수는 고문으로 죽거나 산 채로 헬기에 실려 태평양에 던져졌다고 한다. 이 피닉스 작전에 차출되었던 제프 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우리는 그곳에서 잔학한 행위가 정상적인 것이라고 배웠다. '''피닉스 작전'''이 우리 군인들을 타락시킨 것이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다. 어떤 베트남 사람에게 증거는 없지만 베트콩과 내통했다는 혐의가 있고, 그가 지금쯤 어디 있을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한찬 뒤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은, 보고를 받자마자 '''어디쯤'''이란 장소로 날아간 B-52 폭격기가 광범위한 지역까지 초토화시켜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71 1970년 봄 사이공 농과대학에 다니던 남녀 학생 11명이 반정부시위와 관련하여 가혹한 고문을 받은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70년 7월 인권유린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맥클로스키 등을 포함한 미 하원의원 4명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이를 확인해보는 일까지 있었다. 심지어 베트남 수용시설 조사단에 참가했던 호킨스 하원의원은 '''북베트남 미군포로 수용시설이 남베트남의 미군 관할 수용시설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라며 미군의 범죄행위를 규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출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p.416] 특히 월맹군이나 베트콩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허구헌 날 자기네들만 피해를 보자 화가 난 미군들은 애꿎은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군 최악의 학살인 '''[[미라이 학살]]'''이다.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가 이끄는 미군은 미라이 촌에 들어가 단 하루 동안 총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여자와 노인 그리고 어린아이들이었다. 미라이 학살을 벌인 미군의 학살방법은 말 그대로 잔인하고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학살당한 노인은 총검으로 난자당했고, 어떤 노인은 우물 속으로 던져진 다음 수류탄 세례를 받았으며, 미군 병사들은 어린 여자아이들을 강간했다. 강간한 여성 5~6명을 한 오두막에 집어넣은 다음 수류탄으로 던져 폭사시키는 천인공노할 만행까지 저질렀다.겨우 발걸음을 때기 시작한 아이들까지 한곳에 모아놓고 총살하는 짓까지 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91] [[미라이 학살|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는 결국 1969년 어느 양심있는 기자에 의해 진상이 드러난다. 그 외에도 미군이 저지른 학살로는 '''탄퐁 학살, 송탄 학살''' 등이 있는데 이 두 가지 학살은 미라이 학살과 더불어 모두 진상조사와 진실규명이 확실하였고 당시 종군기자가 학살 당시를 확실하게 찍었기 때문에 빼도박도 못하고 미군의 짓임이 드러난 사건들이다. 1965년 말에 창설된 타이거 부대는 1967년부터 베트남의 꽝응아이성에서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에게 베트콩이라는 혐의를 씌워 고문 및 살해하고, 생업에 전념하는 오지 마을을 습격하여 어린이 부녀자 노약자 등 주민을 학살했다. 심지어는 젊은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고, 부녀자의 품에 있던 유아도 목을 베거나 군홧발로 밟아 죽였다고 한다.[* 출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p.423] 켄 번즈가 2017년에 제작한 PBS 베트남 전쟁을 보면, 당시 타이커 부대가 어떠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는지, 보다 상세하게 나오는데, 아래의 내용은 다큐멘터리에 나온 인용문이다. >방송인: 스타우드 씨, 베트남엔 언제부터 언제까지 계셨죠? > >스타우드: 저는 베트남에 1966년 9월부터 1967년 9월까지 1년 동안 있었습니다. > >방송인: 어느 부대에 있었죠? > >스타우드: [[제101공수사단]] 제1여단입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오는 그 공수부대다.] > >방송인: 베트남에 계실 때, 미군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직접 목격하신 적이 있나요? > >스타우드: 네, 있습니다. > >스타우드: 이 잔혹행위들은 제가 육군 신문 기자로 배정된 부대의 병사들이 짓입니다. > >스타우드: 한 베트남 소녀를 강간하고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심문 때문에 구금된 소녀가 이틀 동안 겁탈당하고 나서, 사흘째 오전에 살해된 사건이었죠. > >방송인: 한 명 이상이 겁탈한 건가요? > >스타우드: 네, 위생병과 저 그리고 소대원 한 명을 빼고는 모두 가담했어요. > >방송인: 당신은 반대했고, 그들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습니까? > >스타우드: 네, 강간 사건 이후에 해당 대대의 원사에게 항의했더니, 그의 대변은 '''이런 일은 전쟁에서 흔히 일어나는 거라면서 입 다물라고 하더군요.'''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군목한테 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군목이 자체 조사를 했고, 사실이라는 게 밝혀져서 같이 주임 원사한테 갔더니, 그가 군목에겐 종교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하면서, 돌려보냈고, 저한테는 입 다물라고 하면서 다음 임무에서 돌아올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 >PBS 베트남 전쟁 5화 타이거 부대의 전쟁범죄가 발생한지 몇 년 후에 또 다른 병사가 나서서, 전쟁 범죄 행위를 추가로 제기 했다. 제기한 내용 중에는 '''목을 베어서 그 여자를 죽였다.''','''귀를 베어냈다.''', '''10명의 농부를 살해한 후 발포를 멈췄다.''', '''북베트남 병사의 머리 가죽을 벗겼다.'''등의 내용이 있었다. 육군 조서 결과 타이거 부대 소속 18명을 살인이나 폭행으로 기소할 만한 근거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고, 이 공식 기록은 기록 보관소에 깊이 파묻혔었다.[* 전반적인 내용은 PBS 베트남 전쟁 5화를 참고함] 심지어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폴 토머스 체임벌린의 경우 '''미라이 학살은 남베트남에서 보고된 수백 건의 대학살 중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며, 이 대학살 가운데 일부는 손미에서 벌어진 학살을 능가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체임벌린 교수가 예시를 든 것이 바로 타이거 포스인 미국 제101 공수사단 정예부대가 1967년 7개월 동안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서 벌인 공포작전이었다. 이 기간 타이거 포스는 최소 수백 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한 것으로 기자들이 추산했는데, 많은 사람이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렸으며, 미군 병사들이 부녀자와 아이들이 무리 지어 있는 벙커에 수류탄을 던져 사살했다고 한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한 위생병은 '''거의 모든 병사가 귀목걸이를 하던 때가 있었지요. 우리는 마을로 들어가서 무턱대고 아무한테나 총을 갈기곤 했어요. 구실이 필요 없었죠. 사람들이 보이면 그냥 죽였습니다.'''라고 이후 회고했다.[* 폴 토머스 체임벌린, 김남섭 옮김,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이데야, 2023, p.372.] 이와 같은 타이거 부대의 전쟁범죄는 이후 [[전쟁의 사상자들]]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쉽게 말해, 이러한 미군의 전쟁 범죄가 전쟁 과정에서 군부에 의해 은폐된 것. 미군의 또 다른 전쟁범죄로는 1969년 당시 미군이 몇 개월 동안 전개했던 군사작전인 초고속 작전(Operation Speedy Express)가 있다. 이는 소위 미군의 평정작전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례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의사는 자신의 병원에서 1969년 초 4개 부락의 최소한 1,000명의 주민을 치료했다고 전했는데, '''사람들은 예외 없이 대부분 민간인들로 비행기와 대포, 헬리콥터에서 밤낮으로 쏘아대는 로켓, 포탄, 폭격, 총알 등의 무자비한 연발공격 때문에 죽었다.'''고도 증언했다. '''이 4개 부락 중 한 지역에서는 주민이 16,000명에서 1,600명으로 줄었다.'''[* 미국 대외정책론 p.371] 초고속 작전으로 학살당한 비전투원 즉 민간인은 최소 5,000명에서 7,000명 많게는 10,000명으로 본다. 미군이 바디 카운트로 사살한 15,000명 중에 최소 절반이나 40% 이상은 민간인이었던 것이다.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은 저서 미국 대외정책론에서 초고속 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미군 사령부는 B-52 폭격기와 무장 헬리콥터의 공격, 혹은 포격, 네이팜 폭탄, 그리고 대인용 무기 등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아마도 5,000명의 비전투원이 죽었을 것이다. 사태를 정직하게 검토한 것이라면 최소한 버클리와 심킨의 상세한 조사에서 밝혀진 민간인 사상자에 대하여 다소라도 언급이 있어야 했을 것이며, 또 사상자 수는 제쳐 놓고라도 방금 개괄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 수행된 작전의 의미를 생각해 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위는 공식 소식통을 지지하기를 더 좋아해서, 스스로 "초고속 작전의 엄청난 결과"라고 부른 그 결과에 대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에 다소 의문을 표현했을 뿐이었다. 미국의 침략에 맞서 남베트남인들이 성공적으로 대항해 왔던 그 지역에서 이렇게 평정작전이 이와 같이 성공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질문을 회피하고 있다. >----- > 미국 대외정책론 p.376 일본인 기자인 가츠이치 혼다 또한 1969년 여름, 미국 공군은 메콩강 삼각지역에 있는 끼엔호아를 집중 폭격했던, 초고속 작전을 취재했다. 폭격 후 미군 9사단의 50대 무장 헬리콥터는 마을을 샅샅이 뒤졌고, 사격 목표는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 <아사히신문> 특파원 가츠이치 혼다는 그것을 '''아시아인 사냥'''이라고 표현했다. 미군 공식기록에 따르면 ‘적’의 사망자 수가 1만899명인 데 비해 포획된 무기는 748정에 불과했다.[[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8290.html|관련 기사]] 따라서 초고속 작전은 말 그대로 미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살상을 벌이면서, 베트콩을 죽였다고 거짓 보고한 사례였다. 사실 친서방적 성향을 가진 일본인 기자 가츠이치 혼다[* 일본군의 전쟁범죄인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실된 목소리를 낸 인물로, 젊은 시절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다.]는 초고속 작전의 실체를 알기 2년 전인 1967년 가을 메콩강 삼각지에서 미군 헬리콥터가 '''농가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하고 '''마치 사냥을 하는 것처럼 농민들을 조준'''하며 무방이 상태의 마을을 공격한 상황을 보도했었다.[* 혼다에 따르면, 이러한 무차별 민간인 살상행위가 베트콩의 테러로 왜곡보도 되는 사례가 적잖게 있었다고 하며, 본인 또한 북베트남군 취재를 가려고 하니까 베트콩 쪽에서 기자가 전장에서 죽으면 미군 측에서 자신들의 테러라는 거짓선전을 할 것을 염려했다고 말했다.] 아래는 당시 혼다가 보도한 내용중 일부다. > [[미군|그들]]은 아시아인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이 폭격은 메콩 삼각주 병원들의 수술실이 부상자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 > 여론조작 p.330 즉, 베트남 전쟁 당시 요새화 된 마을이 건설되면 주변 지역은 사실상 미군의 공격용 헬기와 야간에 폭격기의 무제한적이고 무차별 표적지대가 된 셈이다. 따라서 한 지역이 자유사격지대로 선언되면, 지상군이나 공군이 그곳에서 보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군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더글라스 키내드(Douglas Kinnard)는 1969년 5월 제2 야전포병부대 지휘사령관으로 베트남에 갔을 때, 공격목표가 공식적으로 야간 등화관제가 해제된 지역 중에서 무작위로 추출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이 무차별 발포에 의해 죽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결코 서방 측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 광경을 보도한 외신 기자들도 비슷한 관찰을 했다.[* 미국 대외정책론 p.364~365] 또한 앞에서 가츠이치 혼다가 보도한, 1967년 미군의 베트남인 사냥식 살인행위는 사실상 북베트남 군부대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저지른 행위였다. 미군의 이러한 사냥에 의한 희생자들은 미군 기록에 공식적인 사망자 수에 들어가 있지 않았으며, 또 어떠한 대량학살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 대외정책론 p.365] 베트남 전쟁 당시, 반공주의적 신념에 부풀어 해병대로 참전했던 한 해병대 대원은 1967년 미 상원의원인 윌리엄 풀브라이트(William Fulbright)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나는 책임이 막중한 해병대 소위로서 공산주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는 지친 사람들의 호소에 부응하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베트남에 왔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대략 2주 동안 지속됐습니다. 공산주의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대신 우리의 군사활동의 90%는 남베트남 주민들을 상대로 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이공 정부에 대해서 조금의 호감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혹은 그 정부에 대해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남베트남에서 그 진정한 국민들로부터 아무런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 정부에게 그 국민을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진정한 국민이란, 전시 축재자가 아닌, 혹은 쉽고도 이익이 된다고 해서 자신의 정부나 미국을 배반하지 않는 모든 베트남인을 의미합니다. >---- > 미국 대외정책론 p.386 미국의 이런 폭압적인 행위는 베트남 민간인들의 반감을 불러왔고, 민간인들이 베트콩에 가입하는 불씨가 된다.[* [[로빈 윌리엄스]]가 주인공으로 출현했던 [[굿모닝 베트남]]을 보면 극중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친구로 여겼던 베트남 청년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자세한 건 영화 참조. 사실 베트남 사람들이 베트콩과 북베트남을 지지했던 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 미국은 프랑스를 떠난 뒤 대신 들어온 제2의 프랑스였던 측면도 많이 반영됐다.]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전쟁 범죄는 단순히 1968년에 일어난 미라이 학살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군의 전쟁 범죄는 단순히 미라이 학살로 한정되지 않는다. 사실 미라이 학살 또한 은폐될 뻔했던 사건이 빼도박을 수 없을 정도로 공개된 사건이지, 크고 작은 미라이 학살들이 빈번히 벌어졌다. 실제로 미라이 학살을 은폐한 죄목으로 기소당한 오렌 핸더슨 대령은 1971년 초 기자들에게 여단 정도 크기의 모든 미군 부대는 어딘가에 각자의 미라이를 숨겨두고 있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왜 호찌민인가 p.16] 주월미군 총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는 베트콩이 장기적으로 통제하는 곳에 살고 있는 민간인을 무장한 전투원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채택했으며, 1965년 9월 MAC-V의 지침 전문인 525-3은 공산주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지배를 하든 전혀 지배를 하지 못하든 간에 그러한 민간인 보호는 인구 밀집 지역에만 적용했다. 실제로 웨스트모어랜드는 자유사격지대가 설립된 시점에서 그는 “남아있는 누구도 적 전투원으로 간주해라!”, 그 지역에서의 작전은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해질 것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미라이 지역에 보내졌던 병력이 받았던 명령이었다.[* [[https://www.fff.org/explore-freedom/article/ken-burns-left-vietnam-story/|What Ken Burns Left Out of the Vietnam Story]]를 참고함.] 사실상 민간인과 베트콩의 구분이 자유사격지대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초고속 작전만 하더라도, 미군의 일상적인 전쟁범죄가 어떻게 은폐되어 왔는지 알 수 있는 증거가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공군 장교로 참전했던 브라이언 윌슨(S Brian Wilson)은 1969년 초고속 작전에도 참전했고, 민간인 살상이 어떻게 은폐되는지 보았다. 닉 터스(Nick Turse)가 쓴 책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초고속 작전 당시 호전적인 미군들이 건쉽의 지원을 받으며 잔혹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것만이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아니었다. 미군 기록에 따르면, 초고속 작전 기간 동안 대략 6,500번 이상의 항공 지원이 동반됐고, 최소 5,078톤의 폭탄과 1,784톤의 네이팜탄이 투하됐다. 메콩델타 전역에 있는 자유사격지대에서 폭격으로 인한 파괴관련 조사를 수행한 공군 대위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씨는 '''그 참담한 결과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폭격피해의 현장은 부도덕성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고 했고, 이후 윌슨이 인터뷰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 '''나는 항상 모든 것을 불태우고 튀겨버리는 두 개의 네이팜탄이 투하되어 끝난 현장을 항공 폭격 이후에 조사했던 적이 있다. 나는 현장에서 최소 62명 이상의 민간인 시신을 셌다. 공습관련 군보고에서 나는 대략 15명에서 25명의 여성과, 대부분 엄마 손에 안겨 있거나 혹은 엄마 가까이 있던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수많은 노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윌슨 씨는 군의 공식적인 사망자를 읽고서, '''앞서 보고한 민간인 학살 관련 보고가 베트콩 130명 사살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Picador, 2013, p.212 베트남 전쟁 범죄 워킹 그룹(Vietnam War Crimes Working Group)은 최소 300건 이상의 학살, 살인, 강간, 고문, 폭행, 신체훼손 및 미군이 저지른 여러 잔혹행위등을 조사하여 밝혀냈으며 문서에 기록했다. 이 자료에는 137명의 민간인이 미군에 의해 학살 당한 것과 78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고 부상당하고 성폭행 당한 사실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들이 기록한 자료에는 그 당시에는 입증되지 않은 최소 500건 이상의 양민학살을 포함한 여러 전쟁범죄에 관한 내용도 포함했다. 대표적으로 2003년 당시 공론화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타이거 부대의 전쟁범죄가 그 예시다.[*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picador, 2013 p.14~15를 참조.]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이유에는 이른바 바디 카운트(Body Count)를 들 수 있는데, 미라이 학살 또한 공론화 되기 전에는 바디 카운트로 인한 전과보고였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지지했던, 독일계 역사학자 권터 루이(Guenter Lewy)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바디 카운트로 죽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 중 1/3인 22만 명 이상이 민간인이며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해 죽었으며, 이에 따라 적군 사살로 기록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Guenter Lewy, America in Vietnam, Oxford, 1978 p.450~451][* 심지어 루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참전을 지지했던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토마스 셰이어(Thomas Thayer)의 경우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서 20~40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군사작전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지만[* 토마스 셰이어는 미국과 남베트남의 군사작전 상으로 죽은 민간인이 40만 명 이상이라고 추산한반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해 죽은 민간인은 3만 3,000명으로 보았다. 즉,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 보다 연합군 측에 의해 죽은 민간인들이 최소 10배 이상이라 추산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래 후술되어있지만, 연합군측 추산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자유사격지대에서 행한 무차별 폭격과 같은 전쟁범죄는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만의 경우 1970년 기준으로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의 최소 80% 이상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것이라 추산했다.], 어스틴 머피(Austin Murphy)에 따르면 이 추산치는 남베트남측 병원에 입원한 이들을 근거로 추산한 것이지, 미군이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감행한 곳에서 죽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의 숫자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Austin Murphy, 『The Triumph of Evil』,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p.39~40] 폴 토머스 체임벌린이 쓴 저서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에 따르면, 나중에 미국 의회에서 조사한 바로는 1968년까지 최소 30만 명의 남베트남 민간인들이 소위 미국이 만든 자유사격 지대에서 죽거나 다친 것으로 추산됐다.[* 폴 토머스 체임벌린, 김남섭 옮김,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이데야, 2023, p.370.] 노엄 촘스키와 더불어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에드워드 허만(Edward Herman)은 1970년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살인적인 군사작전에 의해 사망한 남베트남 민간인을 100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Austin Murphy, 『The Triumph of Evil』,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p.22] 따라서 이러한 추정치를 생각해 보았을 때,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및 살인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미군은 아이젠하워와 특히 케네디 정부 시절부터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의 백색테러와 학살을 동반한 작전으로서의 학살을 지원했다. 당시 미군 고문단의 역할을 남베트남군을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게릴라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억울하게 민간인이 희생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따라서 미군 고문단 또한 베트남 전쟁 초기 전쟁범죄 부분에 있어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 그리스 내전에서 미군고문단의 양민학살적 정책이나 해방 이후 제주4.3사건에서 미군정의 책임이 있는 것과 같은 이야기. 당시 남베트남의 백색테러로 인한 인명살상의 규모는 베트남 역사를 연구한 서구의 1세대 학자 버나드 폴(Bernard Fall)이나, 유명한 철학자 버틀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65년 미군 개입 이전까지 대략 8~10년이라는 기간 동안 10~17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자세한 내용은 [[응오딘지엠#s-2.7]] 2.7문단을 참고. 베트남 전쟁 당이 미군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는 역사적으로 굳이 단절된 사건이 아니다. 미국은 미서전쟁 이후 필리핀을 식민지 지배하는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필리핀인을 짐승 죽이듯이 학살했다. 니카라과에서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미국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민가를 폭격하여 수백 명을 죽였으며, 해방 후 한반도 이남에서 발생한 제노사이드에도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무차별 폭격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이미 일어난 현상이었고, 응오딘지엠 정부의 반게릴라전에 따른 양민학살은 1946년 미국이 개입한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에서 이미 선행학습된 일이었다. 특히나 존슨 정부가 남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면서 군사작전은 더욱 광범위하고 잔혹하게 변했으며, 이것은 결국 100만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이 미국에 의해 학살당한 양상으로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 진상조사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양민학살 때문에 베트남 정부가 거부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문제는 특별한 근거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나 역사적으로 20세기에 벌어진 좌우갈등에서 학살과 테러의 규모는 항상 좌익보다 우익들이 더 광범위했다는 사실을 손쉽게 망각한다. 베트남 전쟁과 비슷항 양상을 보인 제주4.3사건만 하더라도 양민학살의 90%는 우익들이 했다. 제주4.3사건은 한국의 반공주의 정권에 의해 공산군들의 폭동 혹은 좌익들의 양민테러로 인식되어 왔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다루는 서술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이 쪽은 과거 오리엔탈리즘적 성격을 그대로 반영했다. 거기다 토마스 셰이어의 자료편향적 추산만 가지고 보더라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에 의한 민간인 희생은 연합군 보다 최소 1/10 차이를 보인다. 이 문단에서 설명한 미군의 전쟁범죄 행위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고, 특히 폭격이나 고엽제로 인한 피해자는 무수히 많다. 따라서 일각에서 주장하는 베트콩의 전쟁범죄 행위 때문에 진상조사를 안한다는 식의 주장은 극히 일부의 사례를 과장한 것일뿐, 남베트남 정부나 미국 정부의 행위는 철저히 무시하는 맥락생략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